한국의 메인스트림 시장에서 랩을 꾸준히 해 온 사람은 드문 편이다. 하지만 조PD는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메인스트림 시장에서 살아남아 왔다. 반항적인 느낌으로 충만한“Break Free”를 시작으로 국민 대부분이 아는 “친구여”를 지나 아이돌 그룹 기획까지, 그는 때로는 다양한 흐름을 스스로 주도하며, 때로는 그 흐름을 타며 꽤 굴곡진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렇게 길게 활동한 사람 치고 의외로 '힙합 매거진'과의 인터뷰는 최초라고 한다. 살아있는 역사이자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아티스트, 조PD를 만나고 왔다.
LE: 안녕하세요. 우선 힙합엘이 회원 분들에게 인사 부탁합니다.
조PD: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조PD입니다. (웃음)
LE: 긴 시간의 공백 후에 앨범이 나왔어요. 이번 앨범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더 자세히 하겠지만, 앨범 준비 외에 다른 일들이 있었나요?
회사와 집을 부지런히 오가고, 퇴근길에는 술을 먹으며… (웃음) 그렇게 지냈어요.
LE: 최근 앨범 관련해서 일이 많으실 것 같아요. 꽤 바쁘신 걸로 아는데, 어떤 것들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저희 회사에서 후속으로 나올 신인 팀을 2년 정도 준비를 해왔고요. 그리고 기존에 있는 아티스트중에는 이블(EvoL)의 쥬시(JUCY)가 정규 혹은 EP 앨범을 목표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LE: 힙합 커뮤니티, 웹진과는 얼마 만에 인터뷰를 하시는 건가요? 제가 알기로는 꽤 오래된 걸로 아는데요.
저는 힙합 사이트와는 이번이 인터뷰가 처음인 것 같아요. 매체 인터뷰는 최근 들어 60군데 정도 진행을 했고요.
LE: 저희 인터뷰 혹시 보신 적 있으신가요?
힙합엘이 토크콘서트를 봤어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지면 인터뷰도 아마 봤을 거예요.
LE: 워낙 오래 하셨고, 또 할 말이 많기 때문에 인사는 짧게 넘어갈게요. 가장 처음부터 이야기해볼게요.처음 힙합 음악에 관심을 가지신 건 언제인가요? 유학 생활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너티 바이 네이처(Naughty By Nature)였어요. 고등학교가 1학년 때 제 옆방에 할렘에서 온 친구가 있었어요. 사립학교 기숙사였는데, 주에서 장학금을 주는 인원을 어느 정도 수를 채워야 했었어요. 그러면서 오는 친구들이 주로 할렘 같은 빈민가나 이런 곳에서 오는 친구들이었죠. 그런 애들이 듣는 음악을 저도 듣게 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LE: 대학 시절에는 처음에는 디자인 대학을 다니시고, 후에 버클리 음대를 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혹 음대를 가게 된 시점부터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
아니에요. 미국 가기 전에 밴드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었어요. 중2 때였죠. 미국 가서도 밴드를 계속 했었고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디자인 학교에 가서 DJ를 했어요. 그래서 학교를 옮긴 시점과 음악을 시작한 시점과는 무관해요.
LE: 그럼 밴드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제가 원래 부산에서 살다가 중1 말쯤에 서울에 올라왔는데, 올라왔으니 서울 친구들이랑 친해져야 했었어요.한번은 친구 생일파티에 갔었어요. 근데 모여있던 친구들이 돈을 모으더라고요. 생일선물을 안 하고요. 뭐 하려고 돈을 모으냐고 물으니 밴드를 만들고 싶은데 드럼이 없어서 드럼을 사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친구들이랑 어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노래를 불렀는데, 친구들이 ‘야, 네가 보컬을 해야 되겠다.’라고 해서 보컬을 맡았어요. 그때 그 드럼 치던 친구가 굉장히 다재다능해서 모든 악기를 다 다루는 친구였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노래를 하거나 기타를 칠 때는 제가 드럼을 치는 포지션을 맡았어요. 그다음에 미국에 건너가서는 드러머로 밴드 활동을 했었죠.
LE: 그때는 락 음악을 하셨던 건가요?
네. 헤비메탈이었죠.
LE: 그러다가 1997년 나우누리에 곡을 공개하면서 세간에 알려지셨어요. 아직도 “Break Free”는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곡 중 하나인 것 같은데요. 당시에 어떻게 공개하게 되신 건가요?
“Break Free”는 당시에 제가 곡을 막 쏟아내고 있던 시기였는데, 제가 곡을 쓰면서 달라진 성격이 뭐냐면… 원래는 집에서는 잠만 자고 항상 밖에 나가 있는 성격이었어요. 맨날 돌아다녔는데, 작업을 하면 그게 안 되잖아요.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까 사람을 만나는 횟수가 많이 줄었어요. 친구들도 저희 집을 아지트 삼아 막 오고 그랬었는데, 그중에 한 친구가 PC 통신과 컴퓨터 게임에 심취해있던 친구였어요. 근데 그 친구가 그때 만들었던 “Break Free”를 좋아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 친구가 제 팬이자 매니저로서PC 통신에 곡을 등록한 거예요. 거기서부터 시작이 된 거였죠.
LE: 올리실 때 어떤 반향 같은 것을 생각하셨었나요?
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만들고, 그 친구는 이런 반향이 있다고 말해주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가끔 그 친구 집에 가면 게시판 글들을 쭉 읽고 그랬어요.
LE: 당시에 최초의 mp3 공개 곡을 내기도 하셨었고, 최초의 18세 미만 청취불가 앨범이란 타이틀(?)도 받으셨었어요.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제2의 서태지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던 걸로 기억해요. 얼굴을 공개하지도 않았고요. 본인은 당시에 그런 반응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었는지 궁금해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당연히 굉장히 기뻤었겠죠? (전원 웃음) 질풍노도 같은 시기여서 매일매일 새로운 일이 터지고 생기던 시기였어요.
LE: YG 엔터테인먼트의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거절하시고 본인의 레이블을 설립하셨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YG 엔터테인먼트의 제의를 거절하고 레이블을 따로 설립하셨던 건가요?
그때 한국에서는 언론 보도가 된 뒤였는데, 학교가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자동응답기에 레코드사들의 전화가 굉장히 많이 와있었어요. 메이저 기획사, 유통사 등등… 근데 정작 저는 ‘Making Independent Records’라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어떻게 인디 레이블을 설립할 수 있는지에 관한 책이었죠. 그래서 일단은 레이블을 설립하고 연락이 온 회사 중에 나와 동업을 할 의사가 있는 회사를 따졌죠. 그래서 같이 하게 된 회사가 예당이라는 회사였고, 50 대 50 지분으로 만든 거였어요. 레이블은 그렇게 시작이 됐던 거였고, 그 후 며칠 뒤에 (양)현석이 형을 만났어요. (양)현석이 형이 지누션의 지누 형이랑 같이 왔었는데, 저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예당의 변대윤 사장과 같이 나갔었죠. 근데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변대윤 사장은 (양)현석이 형 회사의 매니지먼트와 유통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YG 엔터테인먼트는 매니지먼트가 없었고 맡기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변대윤 사장은 같이 합작해서 조PD를 PR하기를 원했고, (양)현석이 형은 제가 YG 패밀리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를 원했어요. 그 와중에 정작 저는 완전 다른 회사를 만들어놓은 상황인데, 그 얘기를 저에게 한 거예요. 그래서 거절을 했다기보다는 회사가 있다고 얘기했던 것뿐이었죠.
LE: 혹시 그때 서태지 씨도 직접 만나셨었나요?
서태지 씨가 왜 엮이게 됐냐면, 서태지 씨가 (양)현석이 형에게 조PD를 만나라고 얘기를 했었어요. 결론적으로는 전화통화만 하게 됐었고요.
LE: 이후에 “Fever”라는 곡을 공개하면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이 알려졌어요. 당시에는 이정현 씨의 참여도 인상적이었고, 이후 이정현 씨와는 “I love x”를 비롯해서 앨범도 함께 작업하셨어요. 그런 것들도 역시 예당이 계기가 되어 가능했던 작업들이었던 건가요?
네, (이)정현이 거 같은 경우에는 맞아요. 예당에서 한 경우였어요.
LE: 일찍이 싸이(Psy) 씨와도 깊은 인연이 있으신데요. 처음 싸이 씨를 어떻게 알게 되셨던 건가요?
그게 디자인 대학을 다닐 때였어요. 언제 한번 제가 여자애들이랑 노래방을 갔는데, 그 여자애들 중의 한 명이 싸이의 누나였어요. 그 자리에 동생을 불렀던 거죠. 노래를 하는데, 지금 콘서트에서 하는 짓을 노래방에서 하는 거예요. (전원 웃음) 미친놈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두 번 다시는 안 볼 생각이었는데, 보스턴에 가서 버클리 음대를 다닐 때는 제가 나름 유명인이었을 거 아니에요. 저에 관한 이야기가 더 퍼지고 나서니까요. 그때 싸이가 비디오 가게에서 우연히 저를 보더니 그때부터 스타덤(Stardom)에 들어오려고 스토킹을 하는 거예요.
LE: 그럼 싸이 씨를 스타덤으로 받아주셨던 적이 있으셨던 건가요?
그래서 저는 전화를 씹으면서 안 마주쳤으면 했어요. (웃음) 근데 제가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이 새끼가 나와 있어. 제 친구들을 꼬신 거죠. 그러면서 계속 엮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도 안된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PC 통신에 곡을 올리면서 저처럼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길래 ‘그래, 너 열심히는 하니까 해봐라.’라고 했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한국을 가서 예당이랑 계약을 한 거예요.
LE: 이제는 두 분 다 그때와는 서로 전혀 다른 위치, 전혀 다른 입장이 되었잖아요. 두 분 다 한 가족의 가장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우리가 늙은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회상할 정도로 다 끝난 게 아니잖아요. 서로 계속 바쁘잖아요. 물론 순간순간 그런 건 있어요. 싸이가 저를 설득할 당시에 ‘니가 뭘 할거냐. 니가 어떻게 가수를 하냐. 니 모습을 봐라.’라고 했을 때, 싸이가 저한테 모히칸에 선글라스 쓰고 MC 해머(MC Hammer)처럼 춤을 추면 사람들이 우스워서라도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그랬는데, 작년에 MC 해머랑 공연을 했잖아요. 그런 걸 봤을 때의 전율은 있어요. 그 외에는… 모르겠어요. 원래는 (유)건형이랑 제가 7월쯤에 미국으로 넘어가려 했었어요. 근데 일단(유)건형이에게는 먼저 가라고 하고 따라간다고 했는데, 이번 활동 때문에 못 가게 됐어요. 어쨌든바쁘죠. 걔도 바쁘고, 저도 지금 이렇게 활동하면서 바쁘고…
LE: 다시 돌아와서, 우선 “Fever”가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이번 앨범 수록곡 중 “On Sight”과 굉장히 흡사하다는 의견이 팬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어요. 그만큼 실험적이고 앞서나간 곡이면서도 테크노 사운드의 차용이라는 공통점도 있는데, 당시 “Fever”를 만든 게 된 건 테크노가 유행이었던 점이 큰 요인이었나요?
당시의 테크노 사운드는 그런 사운드는 아니었어요. “Fever”를 만들던 때가 VIRUS라는 악기가 처음 나왔던 해였거든요. 그게 완전히 최신 악기였어요. 그때 테크노라는 건 하우스였어요. 이정현 음반을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최준영 작곡가가 주로 하던, 그보다 조금 전이면 주영훈 작곡가가 하던 그런 사운드들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롤랜드 프리셋 사운드 같은 거? 그래서 그때 테크노라 말하던 음악과 제가 만든 “Fever”같은 곡은 차이점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칸예 웨스트 곡 같은 경우에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머니 코드는 그냥 치면 나오는 거니까요. 근데 비음악 관련자들이 듣기에는 ‘이래도 돼?’라고 하는 경우인 것 같더라고요. 되게 재미있었어요.
LE: 지금도 힙합 외의 다른 장르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요?
네. 원래 컨트리 빼고는 다 듣는 음악 취향이었는데, 지금은 컨트리도 좋아요. 다 들어요.
LE: 언젠가 인터뷰에서 “Fever”를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도 꼽으신 적 있었어요. 지금도 그러신가요?
곡으로만 치면 “Fever”가 제일 좋고요. 랩은 (이)현도 형 앨범에 했던 “소나기”를 비롯해서 다른 앨범에서 했던 게 더 좋더라고요. (웃음) “Spring Spring”같은 것도 좋고요.
LE: 이때를 기점으로 엄청난 일들이 많이 일어났었어요. 우선 4WD 씨가 디스를 했던 적이 있어요.당시 디스전에는 참여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지켜보셨는지 궁금해요.
4WD 곡은 아직도 못 들어봤어요.
LE: 아, 굳이 지금까지 안 들어보신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일단 잘 몰랐고, 다른 해프닝들도 많았잖아요. 개인적으로는 3집 앨범 준비하느라 되게 바빴었고요.
LE: 이어 얘기해보면, 세 번째 앨범에는 소울 트레인(Soul Train) 출신 사람들이 대거 참여가 있었어요. 어떻게 같이 하게 된 건가요?
DJ 우지(DJ Uzi). DJ 우지가 소울 트레인의 리더였나요? 나이가 제일 많았나… (웃음) 아무튼 DJ 우지를 통해서 다른 소울 트레인 멤버들을 다 만나게 됐고, 제가 아는 크루가 많이 없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콜라보를 하게 됐었던 거죠.
LE: 팬들 사이에서는 “3VIP”가 인기 있었는데요. 그때 “3VIP”를 김진표, 윤희중 씨와 함께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또한, “3VIP” 이후에도 몇 곡을 더 발표하셨었는데, 이후의 이야기도 궁금하고요.
“3VIP” 거의 그 곡만 같이 했던 건데, 일단 처음에는 나머지 둘에게 ‘왜 나보고 하자고 했냐?’라고 물어봤었어요. 당신들이 그래도 지금 한국 랩 음악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들이 아니냐고도 하고요. 윤희중 씨 같은 경우에는 댄스 가수들 랩을 가르쳐주고 있었고, (김)진표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어요. 크루 간의 윤활유 역할을 하기로 했었고요. 그런 여러 가지 면을 봤을 때 3명이 VIP라고 할만하다고 생각했었죠. 윤희중 랩은 저는 지금 들어도 좋더라고요. 확실히 잘해요.
LE: 그리고 네 번째 앨범이 꽤 짧은 기간 안에 나왔어요. 당시에 엄청난 작업량을 보여주셨는데, 당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일단 다른 짓을 안 하는 게 컸고, (웃음) 그리고 그때 ‘지금은 이것만 파야 한다.’, ‘지금은 내가 이걸 할 때다.’라는 걸 알았었죠. 그래서 계속 열심히 했던 거고, 몇백 곡에 달하는 엄청 많은 데모가 있었어요.
LE: 그리고 나서 2004년까지 앨범을 발표하지 않으시는 데요. 그렇지만 앨범이 나오지 않은 대신에 그 사이에 앨범 준비는 물론, 퓨처 플로우(Future Flow) 운영을 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퓨처 플로우 같은 경우에는 아쉽게 끝을 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에 얻은 어떤 교훈이나 노하우 같은 게 있었나요?
일단은 작업을 그만하고 다른 일을 하기 시작한 건 이제 음악만 만들 때는 끝났다고 생각을 해서 전향을 했던 거고요. 아예 작업을 안 했었거든요. 그 이후에 나온 곡들은 거의 다 재고였어요. 퓨처 플로우 같은 경우는 제가 하다가 어떤 회의가 들었느냐면, 지금도 이런 얘기 하면 애들한테는 미안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랬어요. 저는 초창기에 녹음실에서 악기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돈 안 받으며 하는 대신 악기를 빌려서 작업을 했단 말이에요. 근데 저희는 다 해줬거든요. 이거 아니면 더 작업을 많이 할 수 있겠다 싶은 부분을 다 채워줬어요. 숙소, 작업실, 장비, 식당 등등… 근데도 막상 그렇게 해주면 일부는 그냥 게임을 하더라고요. 술 먹고… (웃음) 제가 아까 말한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음악만 할 수 있으라고 해준 건데, 그런 단계가 없으면 하고자 하는 욕구도 안 생긴다는 걸 알게 됐었죠. 그래서 다시 음악을 만들러 작업실로 돌아가게 된 거죠.
LE: 그때 레이블에는 라디(Ra.D), DM, 도끼(Dok2)와 같은 아티스트들도 있었어요. 지금은 각자의 레이블의 어엿한 사장님들이 되었는데, 지켜보면 남다른 소회가 있으실 것 같아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어요. DM이 걸그룹을 만든 건 알고 있었고, 라디는 지금 사장인가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건투를 빕니다. (웃음)
LE: DM 씨와는 요즘 들어서도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두 분 모두 걸 그룹을 보유한 회사 사장님인데…
잘 지낸 지 한참 오래됐고요. 잘 지내다가 연락 안 한 지도 한참 오래됐어요. (웃음) 서로 바쁘고, 저 같은 경우에는 제 일, 회사 관련된 사람 만나는 것만 해도 잘 못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그냥 친목 모임 같은 건 거의 못하고 있죠.
LE: 당시에 레이 제이(Ray Jay) 앨범도 퓨처 플로우에서 나오지 않았었나요?
레이 제이는 저희 회사에 나왔던 건 아니고요. 제가 외주로 곡 작업을 해줬던 거죠. 소속사는 다른 곳이었고요.
LE: 지금도 그렇지만 픽업했던 아티스트들을 보면 굉장히 보는 눈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본인만의 직감이나 기준 같은 게 있으신가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냥 제가 듣기 좋은 음악이 좋은 음악인 거 같아요.
LE: 많이 따지고 까다로운 편이 아니신가 봐요.
음… 라디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 DJ 우지였나 누구랑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누가 데리고 왔었나 했어요. 부산에서 올라왔는데 악기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그러면 음악을 들어보자고 해서 한두 곡 정도 들어보고 바로 영입을 결정했던 거 같아요. 주로 그런 식이었던 거 같아요. 도끼 같은 경우도 부산에 있을 때 데모가 왔는데, 똥 종이 같은 데에 포장돼서 온 거예요. (전원 웃음) 케이스 같은 게 아니고 그냥 두루마리 같은 걸로… 테이프였어요. 그게 도끼가 10살 때였는데, 너무 귀엽잖아요. 그래서 한번 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간지가 완전 힙합 간지인 거예요. 그때도 스타일이 대단했거든요. 후에 영입을 했는데, 처음에 한 1년, 8개월 차까지는 벙어리인 줄 알았어요. 입을 안 열어요. 랩을 안 해요. 대답도 단답형으로 ‘네, 알겠습니다.’라고만 하고요. 그래서 제가 ‘랩을 하겠나?’ 싶었는데, 지금은 말 너무 잘하더라고요.
LE: 그럼 혹시 지금도 눈여겨보고 있는 신인 아티스트들이 있으신가요?
많죠. 엄청 많죠. 근데 우리가 알만한, 지금 활동하는 신인은 아니고요. 연습생이나 정말 수면 아래 있는 친구들.
LE: 4집의 “My Style” 얘기를 잠깐 해보면, 당시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어요. 특히 뮤직비디오가 그랬고요. 더불어 이후 “친구여”의 뮤직비디오도 그 자체로도 나름 인기가 있었고, 또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뮤직비디오의 컨셉은 본인의 아이디어였던 건가요?
뮤직비디오는 그때 뮤직비디오 감독의 컨셉이었어요. 물론 여러 시안 중의 하나였죠. 그리고 앨범 컨셉은 당연히 제가 만든 거고요. 저는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얘기하는 걸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누구의 아이디어라 할 것 없이 그냥 아이디어가 빌드업이 되는 거예요.
LE: 앞에서 조금 정신없이 얘기했는데, 커리어들을 정리하는 느낌에서 앨범 [Great Expectation]을 이야기해볼게요. 우선 [Great Expectation] 두 장의 앨범으로 발표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두 개를 다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두 장을 다 한 거였어요.
LE: [Great Expectation] 두 번째 앨범의 “친구여”라는 곡은 조PD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큰 기제가 되었어요. 우선 인순이 씨를 선택한 이유는?
방송 쪽에 출입하는 게 용이하지 않다 보니 ‘내가 '인기가요'같은 음악 프로그램에서 활동하지 않아서 PD들에게 메리트가 없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방송 1위를 해서 느끼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송1위를 노리고 작정하고 만든 곡이에요. 인순이 누나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그 당시 공연을 위해 지방에 갈 일이 있었는데, 지방에 포스터도 아닌 푯말로 '인순이 공연'이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웃음) ‘인순이 누나 괜찮은데…왜 이런 대접을 받으시지?’라고 생각하면서 곡에 피처링으로 섭외해보자 해서 박근태 작곡가 형에게 연락해서 섭외하게 되었어요.
LE: 당시 정원관 씨도 제작 과정에 참여하였나요? TV에서 워낙 이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아서요.
제가 퓨처 플로우에서 사장직을 내려놓고 작업실로 들어가게 된 조건이, CEO로서의 제 역할을 대신 맡아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정원관 형을 찾게 된 것이죠.물론 지분관계나 그 외의 것들은 그대로였어요. 이름이 라임기획으로 바뀌면서 퓨처 플로우가 흐지부지된 것처럼 되었지만 실제로 사업자 등록은 그대로 이어졌어요.
LE: 이때부터 다른 작곡가분들과도 많이 작업하셨던 것 같아요. 이후 [PDIS]도 그렇고, 이 곡을 작업하신 박근태 님도 그렇고. 본인도 작곡을 하시고 프로듀싱도 하시지만 이런 작업을 하게 되는 이유가 특별히 더 있을까요?
협업에 재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3집까지 제가 혼자 계속 해 왔잖아요? 그 뒤 라디 등의 조력자들을 만나 협업을 하는 작업은 또 그 나름대로 또 재미가 있어 많이 했던 것 같아요.
LE: “친구여”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웃음)
음…잃은 건 없는 것 같은데? (웃음) 많이 얻었죠.
LE: 더불어 유명한 곡 중 하나인 “고속도로 로망스”가 발표되었어요. 윤종신 님의 버전도 있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는데, 작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그건 (김)장훈이 형… 그때 장훈이 형이 저에게 갑자기 관심을 가지셨어요. 큰 동기는 없어요. 장훈이 형과 녹음하고 놀다 보니 나오게 된 곡이에요.
LE: 랩과 노래를 바꿔 부르기도 했어요. 지금까지 꾸준히 노래를 선보이고 있으시기도 하고요.
제가 왜 그 노래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노래를 해야 했는데, (웃음) 하고 나니 좋다고 해서 수록을 하게 된 거죠.
LE: 랩도 하시지만, 노래를 꽤 해오셨고 잘하시기도 하는데, 앞으로도 또 노래를 선보이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이번 앨범에 있어요.
LE: 활동 기간도 오래되셨고, '나는 가수다'라든가, '불후의 명곡'같은 프로그램에 출연 제의를 받으신 적은 없으신가요?
없어요. (웃음) 없던데? 그리고 '나는 가수다'같은 프로그램에는 랩퍼가 참여한 적이 없지 않나요? 사실은 원하죠. 그런데 모르겠어요. (출연하려고 다른 가수들이) 줄 서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고, 가수들을 만나면"야, 내가 거기에 왜 나가냐?"하는 이야기도 들리고…저와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기도 해요.
LE: 그 후로는 군 복무를 하시고 결혼도 하시고 아들도 낳으셨어요. 지금 아들이 두 분이신 걸로 아는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나요? (웃음)
네,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어요. 일곱 살과 네 살…
LE: 그리고 여섯 번째 앨범 [Money Talks]를 발표하였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저조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 앨범은 그 당시 제가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홍보용 CD조차 돌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아, 아니다… '엠카운트다운' 한번 나갔었구나? 어쨌든 미리 잡힌 스케줄 외에는 정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또…그 앨범이 아마 가온차트 6위까지 하고 떨어졌을 거예요. 그전 작품들에 비해서는 제일 저조했던 성적이었거든요. 거의 사생아 수준? (웃음)
LE: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셨나요?
아쉽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음… 사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좀 있는 앨범이에요.
LE: 2008년에는 콜라보 작업을 많이 하셨어요. PDIS도 그렇고, 박미경 씨와의 프로젝트도 그렇고요. 그 외에도 꽤 연륜이 있는 아티스트들과 콜라보를 자주 한 것으로도 조PD라는 아티스트가 유명한데요.기존의 아티스트들과 콜라보를 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저와 함께 해보고 싶어하시는 선배들도 많이 있었고, 아무래도 용이했어요. 인순이 누나와 너무 잘됐고, (웃음)인순이 누나와 한 게 연 매출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웃음) 선배님들께 하나의 기회가 된 거죠. 쟤랑 하면 잘 풀린다는 식으로…그런 시기였어요. 꼭 평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어떻게 아다리가 맞게 되면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주현미 선배님 같은 경우는 제가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사람 자체도 정말 좋고요. 브라운 아이드 걸스(Brown Eyed Girls) 같은 경우는 (윤)일상이 형 덕분에 하게 된 것이었고요.
LE: 인상적인 아티스트로는 조덕배 씨와 주현미 씨가 있었어요. 함께 하게 된 에피소드나 그런 것들이 궁금해요.
조덕배 형님은 제가 많이 찾아뵈었었어요. 왜 그렇게 조덕배 형님께 꽂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음악을 굉장히 높이 샀었어요. 리스펙하고 있었어요.
LE: 솔로 앨범 외에 프로젝트 단위의 결과물에 주력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그것도 제안이 너무 많아서… (웃음) 이거 해보자, 저거 해보자 하는 제안이 많았었어요.
LE: 브라운 아이드 걸스와도 작업을 하셨는데, 꽤 꾸준히 작업하셨어요. 디지털 싱글도 그렇고 각자의 앨범 참여도 그렇고요. 특별히 이런 인연을 유지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그 당시에는 (윤)일상이 형은 물론 지금 작사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김이나, 그리고 로엔 엔터테인먼트(LOEN Entertainment)의 조영철 프로듀서를 포함해서 네가 네트워크 관련자들과 굉장히 친했어요. 매일 같이 술 먹고, 밥 먹고 하며 작업을 함께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요새 뭐하고 있냐?’라고 물었을 때 ‘이런 것 하고 있는데…’라고 하면 ‘내가 해 볼까?’ 이런 식으로 됐었죠. 협업이었죠.
LE: 2009년에는 브랜뉴 스타덤(Brand New Stardom)이 생겼고, 이내 2011년에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뭉쳤을 때는 꽤 많은 기대와 주목을 받았고, 이후에 결별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어떤 비전이나 방향의 차이가 있었던 건가요?
뭉친 것보다는 아예 새로 시작을 한 거였어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두 회사가 뭉친 게 아니었죠. (웃음) 브랜뉴프로덕션(Brand New Production)은 페이퍼 컴퍼니였고, 스타덤은 아예 활동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여튼 제가 사무실을 샀죠. 거기서 사람들을 고용하고, 브랜뉴스타덤이 런칭이 된 거예요. 하다 보니여기 우리 (박)동수 씨도 있지만, 프로듀서들을 보면 제가 그다지 안 좋아하는 음악들이 있어요. 제 회사 것인데도 제가 안 듣는 거예요. (웃음) 처음에는 그래도 과외 활동이다 생각하며 괜찮게 생각했었는데, 제가 그때 완전히 꽂혀있었던 블락비(Block B)를 10월에 출시하려고 했었는데, 4월까지 밀리게 되었어요. 계속 뭐가 있는 거예요. 비즈니즈(BIZNIZ) 나오고, 버벌진트(Verbal Jint) 나오고, 미스에스(Miss S) 나오고…그러다 보니 제가 하고 싶은 건 계속 뒤로 밀리는 거예요. 아무리 신경을 써도 사람에게는 24시간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다 끊고서 이것만 하자고 해서 그렇게 나뉘게 된 거죠.
LE: 현재 브랜뉴 뮤직(Brand New Music)은 씬에서 큰 레이블 중 하나가 되었어요. 지켜보고 계실 것 같은데요.
지켜 보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보이고요. (웃음) 라이머(Rhymer) 같은 경우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할 것 같아요.
LE: 협업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가면, “보란듯이”로 방송 활동을 하셨고, 당시에정슬기 씨를 픽업하셨었어요.
그 당시에는제가 회사 운영에 관여를 많이 안 했었어요. 투자자의 개념이 더 컸었어요. 물론 최종 의사 결정은 했지만요. 영입이나 출시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는 OK했지만, 누군가가 주도해서 무언가를 할 때그것을 쳐내거나 막지는 않았어요.
LE: 2011년에는 또다시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시는 데요. 그때도 어떻게 보면 [Great Expectation]의 맥락을 이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Great Expectation]은 완전 성격이 달랐던 두 장의 앨범을 동시에 발매한 것이고요, 일곱 번째 앨범은 단지 분량이 많아서 두 장이었어요. 수록곡들이 “친구여”를 했던 2004년부터 녹음을 했던 곡들이에요. 2009년도까지 쭉 해왔던 것들인데, 저는 마지막 앨범이라고 생각했었고, 많은 데모들이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곡 수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안 하기에는 아깝고…활동하기도 애매하고 해서 내기만 하자 하고 냈던 앨범이었어요.
LE: 앨범에는 굉장히 많은 아티스트들이 피처링으로 참여했었는데요. 그간 정규 앨범들은 비교적 본인의 목소리로 채웠던 편인데, 이렇게 많은 아티스트들과 하게 되었던 계기나 이유 같은 게 있나요?
그 많은 데모들을 내야 하니 혼자 다 할 수는 없어서 ‘쟤 전화해 봐.’라고하면서 채운 거였어요. (웃음)
LE: 저는 이 앨범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조PD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큰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그간의 앨범 중 가장 잘 전달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무엇보다 굉장히 시사적인 메시지도 표현하고 있고요.독특한 사운드나 앨범 구성도 인상적이었는데, 그러한 부분은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아까 다른 매체 인터뷰에서 어떤 표현을 사용했느냐면, 자식을 낳았으면 키워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앨범 같은 경우는 내놓고 버린 앨범이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는데…그때 당시에 제가 블락비의 [Welcome to the BLOCK]앨범을 제작하고 있었거든요. 녹음실에서는 애들이 녹음을 하고 있고, 저는 집에서 믹싱을 빨리 끝내고 녹음하는 걸 봐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LE: 늘 거침없는, 소신 있는 발언으로도 유명하신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부담 같은 게 생기지는 않으셨나요?
생겼죠. 3집 때부터는 음악을 하는 것이 그다지 재미있지가 않았어요.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들이 많았고, 어떻게 보면 정점에 있었던 시기였는데, 그때가 제일 불행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시절이 지나고 나서 지금은 또 전혀 그런 게 없어요. 아티스트라면 저와 같은 과정을 겪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LE: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던 경우도 있으셨나요?
창작에 있어서요? 아니요.그런 게 아니고 하고 싶은 게 아예 없었어요. 방향을 잃어버린 거죠.
LE: 지금까지 쭉 그래왔지만 본인이 직접 모든 것을 기획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피로감이나 힘들다고 느껴지지는 않나요?
지금은 없어요. 우수한 인재들과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고요, 그것 역시 4집 때가 정점이었던 것 같아요. 4집 때는 정말 괴로웠어요.
LE: 아이돌 기획에 대한 이야기도 해볼게요. 블락비도 그렇고, 이블도 그렇고, 이제 나올 탑독(TOP DOG)도 그렇고,아이돌 기획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가 있다면?
누구나 바라보는 시각이 있을 거고, 또 목표도 있잖아요? 저는 제 나름대로 방향성이 그쪽에 있어요. 이걸로 발전을 시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처해있는 상황도 반여가 되겠죠.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언더그라운드 레이블에서 아이돌 기획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저러한 여러 과정들을 봤을 때, 이게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계속 시도를 하고 있는 거죠.
LE: 이블 인터뷰 중, 아이돌이지만 아티스트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또 그것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신다고 하였어요.
네. 저는 애들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실망도 많이 해요. 또 많이 시켜봐요. 어떻게든 하나 보려고요. 그런 면들이죠. 그런데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냥 하면 되는데 계속 재기만 해서 못 하는 거거든요. 정 모르겠으면 힌트는 제가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것 같네요. (웃음)
LE: 블락비나 이블 모두 훌륭한 멤버들의 개별 활동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부분에 있어 얼마나 관여하시나요? 또한, 멤버 캐스팅 역시 직접 관여하시는 편인가요?
(멤버 캐스팅은) 직접 하고요. 개별 활동…권장하는 바에요. 왜냐하면, 저희는 기획 아이돌의 틀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요. 본인들이 다 하면 제일 좋아요. 그게 안 되는 것만 채워주는 건데, 물론 처음에는 많이 채워줘야 하겠지만, 점점 채워줘야 하는 것이 줄어들겠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저는 환영이에요.
LE: 어떻게 보면 메이저 힙합 엔터테인먼트라는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아요.
오히려 관점이 아예 달라요.우리는 우리가 힙합 레이블이라 생각하는데, 주위에서는 저희를 아이돌 회사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게 불과 얼마 안 됐는데도 말이죠. 버벌진트가 있었을 때는 저희가 아이돌 기획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습생들도 거의 찾아오지 않았는데, 1년여의 시간 만에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죠. 아무튼, 저희는 저희의 정체성을 힙합 회사라고 생각해요.
LE: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레이블이 몇 차례 엎어졌는데, 이러한 것에 대한 주변의 반응도 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없었어요. 그리고 사업자 등록은 똑같아요. 초기 스타덤, 사명 변경해서 퓨처플로우, 라임기획, 그리고 다시 브랜뉴스타덤, 다시 스타덤…다 똑같은 사업자에요. 단지 명칭만 바뀌었어요.
LE: 특히나 블락비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꽤 많은 눈을 두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전체적인 개요나 이런 건 묻기 힘들지만, 현재 심정이나 정리된 상황이 궁금합니다.
소속사와 가수간의 여러 분쟁들이 있잖아요?알려진 것도 많지만 사실 알려지지 않은 것들은 더 많거든요. 굉장히 많아요. 그런 케이스 중에 가장 합리적이고, 모양새가 좋은 케이스를 만들고 싶었어요.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요. 지금 자평하기에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전의 구설수들을 털어내고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여기에 있어서 제가 하는 말이 거짓된 표현이나 헐리우드 액션이 아니라는 점, 그 점만 알아줬으면 해요.
LE: 아직 이번 앨범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는데 꽤 기네요. 중간에 공백기가 있지만, 앨범만 해도 정말 많이 발표하셨어요. 왕성한 활동의 동력이 있다면?
(음악 외에) 하고 싶은 게 별로 없고, 할 것도 별로 없으니까 이것만 하는 거죠. 중간중간 관심사를 사업이나 금융이나 이런 쪽으로 가져 보거나, 독서만 일 년간 한 경우도 있기는 해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도 다 이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일들이었거든요. 사업도 그렇고, IT 역시 접목이 필요한 거잖아요. 항상 유사 관련 업종에만 관심을 두며 이걸 계속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LE: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포비커(fobikr)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CCO라고 알고 있어요.
이제는 아니에요. 그때 제가 브랜뉴스타덤의 경영보다는 투자만 했던 이유가 그걸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그걸 접고 제가 다시 꿰차기 시작하면서 정리를 한 거죠.
LE: 새로운 아티스트 양성 작업을 지금까지 꾸준히 해오셨는데요. 본인의 의무라고 생각해서 하시는 건지, 혹은 어떤 의미에서 이어나가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것도 아트죠. 트랙을 만드는 게 아트라면, 그 위에 보컬과 피처링을 얹고 하는 것도 아트가 되죠.아이돌 같은 경우는 거기에다가 아이들의 매칭과 보이스…이런 것들을 다 신경 써야 하는, 점점 커지는 아트인 것 같아요.
LE: '위대한 탄생'에서 잠깐 심사위원으로 나오신 적 있으세요. 참여하게 된 계기나 그때 느꼈던 것들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때 태국에 가서 심사하는 섭외가 와서그냥 한다고 했어요. 그때가 한류가 막 시작될 때였어요. 그래서 현황을 보고 싶었는데, 가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보고 감명을 받고 오게 되었어요. 블락비도 원래는 멤버가 다섯 명이었는데, 많이 바꾸고 일곱 명으로 만들고 했던 것도 그 영향이었어요.얘네 시선에 맞추려면 이렇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큰 경험이었죠.
LE: 조PD 씨는 한국 내에서 포지션이 굉장히 독특해요. 어떻게 보면 활동 기간이 긴 가수이고, 레이블 대표이고, 힙합 아티스트이며 지금까지 함께 한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도 많은 동시에 대선배들도 많아요. 본인은 지금의 포지션에 만족하시나요?
만족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만족을 못 해서 기분 나빴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은 이제 그걸 채워야 되겠다는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포지션이 불분명해요. 확고하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고, 저는 그런 경우거든요. 그런 것들을 모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LE: 본인의 활동 자체는 많았지만, 개인 앨범은 이제 2년 만에 나오는 거네요. 우선 자기PR 시간입니다. 간단하게 이번 앨범 소개 부탁드려요.
앨범은 다섯 명의 프로듀서와 한 곡씩 작업했고요. 굉장히 음악이 스포츠에요. 팀플레이인데, 이게 서로 싸우는 게 아니고 같은 팀으로써 골을 만들어가는 거거든요.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실망시키면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상대방이 패스한 걸 잘 연결해야 하는 것도 있고, 이런 과정이거든요. 이번 앨범을 작업할 때는 매 곡이 그렇게 되면서 팀웍이 좋았어요. 그 사람이 기존에 하고 있는 음악, 그 사람이 잘하는 것과 거기서 내가 같이할 수 있는 합을 맞추는 작업이었죠. 예를 들면, “Made In Itaewon” 같은 경우는 작업 시간이 한 시간 미만으로 걸렸어요. 거의 다 길에서 만들었죠. 대화하면서 거의 다 만들었고, 작업실에 돌아와서는 코드 찍고 비트 만드는 시간 정도가 한 시간 미만으로 걸렸던 거예요. 그렇게 작업 시간이 적었던 대신에 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이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과거, 음악을 해온 것에 대한 스토리 이런 것들을 파악하는 시간은 엄청 오래 잡았죠.
LE: 프로듀서로서도 활동을 오래 하셨는데, 이번 앨범에서 곡마다 다른 프로듀서들과 함께한 것이 기획 의도에 따라 한 것이라고 보면 될까요?
같이 합을 맞출 만한 사람들을 찾고 그로 인해 나온 결과물을 내는데, 그 과정에 있는 재미가 담긴 그런 앨범이죠. 곡을 위해서 누구를 섭외한 것이 아니라 ‘난 얘랑 같이해야 하는데, 얘랑 같이하면 이 방향이 좋을 것이다.이렇게 나올 거야.’ 이렇게 된 거죠.
LE: 처음에 프로듀서들을 섭외하게 된 기준이 있으셨겠죠?
있죠. 내공과 음악성. 잘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LE: 디즈(Deez) 씨 같은 경우에는 사실 세상 밖으로 안 나오시는 분이잖아요. 연락이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에요. 되게 쉬웠고, 다섯 명의 멤버 중에 저랑 제일 친해요. 생각하시는 그런 이미지는 아닐 거예요. (웃음)
제피는 블락비 작업하면서 처음에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이블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어요. 그러면서 당연히 만나는 숫자가 늘어났고, 딥플로우 같은 경우는 여기 있는 (박)동수 씨 (프로덕션 매니저)가 큰 역할을 해서 참여하게 되었고,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연결해줬지만 딥플로우 같은 경우는 잘 아시잖아요. 당연히 리스펙 받아야 할 사람이라 생각해요.
LE: 앨범 트랙별로 넘어가 볼게요. 우선 앨범 제목이 지니는 의미가 굉장히 클 것 같아요.
워낙 다른 매체들이 다 물어봐서… (웃음) 어쨌든 1,2집에는 스물두 살의 제 인생이 거기에 다 담겨 있는데, 그 얘기를 일일이 소진하다 보니까 3집부터 작업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게 더 할 얘기도 없고, 지금의 제 얘기를 해야 하는데 제 생활 반경은 더 좁아졌었거든요. 그때 그런 것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굉장히 컸어요. 가사적인 소재나 그런 부분들인 거죠. 아니면 소설을 써야 하거나 사랑 얘기를 써야 하는데 그건 아니니까요. 그때부터는 작업이 구렁텅이로 빠졌는데, 1집, 2집을 낸 이후로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잖아요. 그동안에 많은 얘기들이 축적이 된 거죠. 자연스럽게 할 이야기가 생긴 거죠. 그래서 1, 2집에 이어 제목을 [In Stardom v3.0]으로 해서 낼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예요.
LE: 많고 많은 곳 가운데 이태원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진보(Jinbo) 작업실이 이태원 해밀턴 호텔 앞에 있어요. 거기서 즉석에서 썼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된 거죠.
LE: 이태원은 평소 자주 오시나요?
그 뒤로는 무조건 거기서 약속을 잡아요.
LE: '썩은 XXX'의 세 번째 버전을 만드셨어요. 같은 제목으로 세 번째 버전을 내게 된 계기가 있다면?다른 제목을 붙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내용이 연결되니까요. “썩은 XXX 1”은 여자들의 허영을 꼬집었던 내용이구요. “썩은 XXX 2”는 부제가 '변태여우'였어요. 사실 어떻게 보면 스웩도 허영의 일부잖아요. 스웩이라는 의미에요. 그래서 “썩은 XXX 3”도 내용상 연결이 되어서 연작으로 하게 되었어요.
LE: 특정 인물을 지목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런 것들을 보고 느낀 게 있어서 가사를 쓰셨을 것 같아요.
제가 여기 있는 (박)동수 씨와도 이런 주제로 얘기를 한두 번 한 것 같은데, 부제가 '어린 꼰대 스웨거'에요. 무엇이냐면 애들이 판단이 이분법적이에요. 요즘 애들이 보면 스웩이 있냐 없냐, 돈이 있냐 없냐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들이 커요. 그렇지만 사실 이 사람이 왜 좋은가에 대해서는 여러 판단 기준이 있잖아요. 진국이라서 좋을 수도 있는 거고, 머리가 좋아서 좋을 수도 있는 거고, 잘 생겨서 좋을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여러 가지 기준이 있는데 왜 그걸로만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고, 그게 아니면 니 스타일이 아니라고 배척하느냐고 얘기하는 거죠.그리고 아시다시피 스웩이라는 주제로 계속 똑같은 얘기 하는 게 지겹기도 하고 해서 ‘그거밖에 할 이야기가 없니’라고 하며 꼬집는 그런 곡이에요.
LE: 훅도 “썩은 XXX 1”의 버전을 다시 쓰셨더라고요. 곡을 들어보면 패닝이 굉장히 신기하게 되어 있잖아요. 그건 시모(Simo) 님의 아이디어였나요?
네.전적으로 시모의 아이디어였어요. 시모는 뭐… 굉장히 훌륭한 것 같아요. 흠 잡을 데가 없어요. 그래서 두 곡을 같이 하게 되었어요.
LE: 슈퍼키드(SuperKidd) 징고 님도 참여를 하셨는데, 곡을 만든 쓰리킹즈(3kings)는 어떤 분들이신가요?
쓰리킹즈는 쓰리킹즈인데 두 명이에요. 이상한 애들이죠. (웃음) 원래는 세 명이 팀을 하려했는데, 한 명이 빠졌어요. 근데 투킹즈로 안 바꾸더라고요. 아무튼, 그중에서 편곡 작업을 하는 친구는 콰지라는 친구인데, 업타운(Uptown) 앨범부터 힙합 쪽을 메인으로 했던 친구에요. 지금은 가요를 하고 있는데, 어쨌든 업타운 시절부터 나름대로 자기의 세계가 있어요.
LE: 락 어프로치가 굉장히 잘 어울리시는데, 그간 이런 곡들이 흔치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가요? 음… 흔치는 않다고 볼 수 있겠죠. 이 트랙이 믹싱을 두 번 엎었어요. 근데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듣기 좋게 잘 나왔어요. 작업이 일사천리로 잘 진행되었는데, 유독 이 곡이 믹싱이 두 번 엎어지다 보니까 중간에 미운털도 좀 박혔던 곡이죠.
LE: 디즈 님과 같이 한 곡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 이제 제목을 보고 아이스 큐브(Ice Cube)의 “It Was A Good Day”가 생각났어요. 물론 내용적인 부분을 다르지만요.
원래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It Was a Very Good Year”가 있어요. 그 형식이죠.
LE: 앨범이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이 외에도 혹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수록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나요?
있었죠. 가사는 썼는데 녹음을 못 한 시모 곡이 하나 있고요. 그리고 녹음은 해놨는데 발표를 안 한 곡이 세 곡 정도 있어요. 1집 이후에 제일 할 말이 많았던 앨범이죠. (웃음)
LE: 이번 앨범의 프로모션 방식이 특이하다고 들었어요. 뮤직비디오는 없고, 마이크로 페이지를 통해 프로모션을 진행하신다고 들었어요.
네. 퍼포먼스 영상으로 대신하려고요.
LE: 지금까지 꽤 많은 작품을 만드셨는데 어떤 음악 스타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으신 것 같나요?
구성으로 말하면 메탈리카(Metallica), 부활, 화성학으로 말하면 퀸(Queen), 비트로 말하면 노토리어스 비아지(Notorious B.I.G.)의 앨범들이죠.대표적으로는 그렇게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LE: 메탈 음악 같은 경우는 지금도 계속 찾아 들으시는 편이신가요?
예전 것들을 계속 듣고 있어요.
LE: 지금까지 앨범의 색채들을 꾸준히 변화시키셨는데, 어떤 게 음악적 원동력으로 작용했었나요? 그게 다른 앨범이든, 다른 아티스트든, 다른 형태의 예술 작품이든 말이죠.
앨범을 만드는 가장 큰 모티브는 계약이에요. (웃음) 저는 앨범을 낼 때마다 항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냈어요. 왜냐하면, 가수를 오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근데 앨범이 잘 되면 좋은 계약이 들어와요. 그러니까 하게 되고, 앨범이 안 되면 더 잘해야지 해서 하게 돼요. 그래서 지금까지 하게 된 거에요.
LE: 혹시 최근 '컨트롤 대란'을 지켜보셨나요? 보셨다면 관련된 개인적인 의견이나 감상평이 궁금하네요.
제가 3주 전부터 살을 빼야 해서 헬스 할 때 아이패드를 놓고 하는데, 원래는 '원피스'를 봐요. (웃음) 운동할 때 자극이 있으면 힘든지 모르고힘도 더 나잖아요. 그래서 '컨트롤 대란'도 스테퍼 위에서 운동하면서 본 거예요. 굉장히 재미있었죠. 얼마나 좋아요. 1석 2조잖아요. 스테퍼 20분 할 걸 40분 했으니까요. 저한테는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디스 대전이었죠. 그리고 다들 잘하더라고요. (웃음)
LE: 지금 새로 등장하는 아티스트들도 다 체크하는 편이신가요?
한다고 해도 다 못해요. 계속 그거만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추천은 많이 받죠.
LE: 지금 씬에 대한 생각이나 후배 뮤지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그렇게 특별히 없어요. (웃음) 저는 이렇게 씬을 위한 말은 해본 적은 없고,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냥 서로 음악 얘기하는 거예요. 소주 한 잔 마시면서… 그런 실질적인 스타일이지, 거창한 비전을 제시한다거나 어떻게 현혹한다거나 (웃음) 그러지는 않아요.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그냥 각자 알아서 열심히 살면 좋은 것 같아요.그러다가 저랑 또 마주치고 얼굴 볼 일 있으면 반갑게 맞이하고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LE: 예전에는 사회적 이슈 같은 걸로도 곡을 쓰셨잖아요. 사회적 이슈에도 굉장히 관심 많으신데, 반대로 요즘의 힙합 팬들은 사회적 이슈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왜 그럴까요? 사실은 저도 관심이 없어요. (웃음) 예를 들면, “Break Free”는 제가 체감할 수 있는 현실이 있었어요. IMF였고, 검열이 되게 심했어요. 확실히 억압을 받고 있었거든요. 그때는 거기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이 공감대를 살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정치적으로 견해가 나뉘는 이슈 같은 경우에는 결국 한 쪽의 공감을 받으면 그 자체로도 이미 반반이 되는 거죠. 제가 봤을 때는 대상이 불투명해서 그런 것 같아요. 예전보다 체감할 수 있는 우선순위가 더 높은 다른 요소들이 많아져서 그런 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상황이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LE: 지금까지 디지털 포맷을 포함해서 앨범 발매에 있어 다양한 시도를 하셨는데, 앞으로도 새로운 매체나 혹은 다양한 시도 같은 걸 선보이실 예정이신지 궁금합니다.
그 질문도 여러 번 받은 것 같아요. 아이디어 회의를 안 하는 건 아닌데요.지금은 과도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당장 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계속 찾고는 있죠.
LE: 활동 중간에 은퇴 선언을 한 번 하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계속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드신 건가요?
그 말을 더 이상 못할 것 같아요. 미안해서… (웃음)
LE: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아직도 굉장히 젊으세요. (웃음) 활동한 시간 이상으로 활동할 시간이 남았고, 앞으로 청사진이 있으실 것 같아요.
힙합과 메인스트림을 아우르는 사람을 만드는데, 꼭 우리 회사가 아니더라도 일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저는 그 필요성을 굉장히 많이 느끼거든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거고, 기왕이면 내가 되면 좋으니까 빨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자리를 채우는 게 기왕이면 저희 회사면 제일 좋고, 아니더라도 조력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LE: 저희 힙합엘이는 자주 들어오시나요?
이제 더 자주 들어가려고요. (웃음) 트위터도 오랜만에 재개했으니 계정들 다 팔로우 할게요.
LE: 힙합엘이 안에서 제일 좋아하는 컨텐츠가 있으시다면 어떤 것인가요?
다 좋은 것 같아요. 다 좋고, 다른 유저들한테 가장 유용한 건 아무래도 자막 뮤직비디오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 것들이 비영어권 랩퍼들에게는 더욱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보거든요.
LE: 후에 어떤 아티스트로 사람들에게 남고 싶으신가요?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제 뜻대로 되는 건 아니에요. 제가 받고 싶은 대우를 제 뜻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게 왜곡 없이 전달하는 건 되게 중요한 능력인 것 같아요. 그게 자기가 청렴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PR해서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건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이 중요해요. 이 사람이 나한테는 이렇게 했는데 저기 가서 딴소리하면 그게 내가 되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주변을 관리하는 등의 능력을 키우는 게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왜곡에 왜곡이 쌓이다 보면 그게 또 결국 자기가 되는 거니까요.그래서 뭐가 되든, 사람들이 나를 뭐로 기억했던 그게 진짜 나랑 근접했으면 좋겠다 싶어요.그렇습니다.
LE: 짧은 시일 내에 가지고 있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라이브 위주로 활동하고 싶어요. 요즘 페스티벌 분위기도 좋고 하니까요. 근데 페스티벌 같은 게 많아지는 건 긍정적인 차원이지만, 반면에 공중파 방송에서 라이브 프로그램이 점점 없어지고 있으니까…그런 것들은 좀 안 좋은 점인 거 같아요. 어쨌든 저는 라이브 위주로만 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다른 것들은 저희 애들이 많이 하니까요. (웃음)
LE: 그러면 방송 활동 같은 것도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엠넷 라이브 프로그램도 나가고,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그 정도? EBS는 너무 분량이 길어서 안 할 것 같고요.